이 전에 읽고 오면 좋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해석 1,2,3탄
<여기서 일 하게 해주세요!! ...굳이?>
일을 일본어로 ‘시고토’라 한다. 치히로는 온천여관의 세계에 들어가 이름을 빼앗긴 뒤 센이 된 후,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책무를 다하면서 성심성의껏 오물신과 가오나시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씀으로써(이건 시고토/일 이 아닌 자발성에서 기여했다고 생각된다)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한다. 그 과정에서 센이 새로운 치히로로 성장하는 정체성 구현의 이야기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핵심 서사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새로운 치히로로 성장하는 정체성 구현의 입문적 이야기라 보는 관점이 본 작품에 대한 가장 상식적인 이해일 것이다. 물론 자신이 맡은 바 책무를 다한다는 ‘기리’ 와 ‘세켄’ 이나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뜻하는 ‘오모이야리’ 또는 하쿠에 대한 센의 보은(온가에시) 등과 같은 문화코드에 초점을 맞추어볼 때 이 작품의 핵심 서사를 입문적 이야기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일본문화코드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시고토’와 ‘잇쇼켄메이’ 및 ‘마코토’에 주목한다면 표면 밑의 다른 심층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본 문화에서 기리나 세켄의 원리는 받은 만큼 돌려주면 끝나는 유한한 책무로 간주되는데 해 시고토는 주군에 대한 충성이나 부모에 대한 의무처럼 무한한 책무로 여겨진다. 그것은 잇쇼켄메이와 마코토의 윤리를 요구한다. 작품 속에서 거대한 가마솥 등 온천여관의 동력원을 관장하는 총책임자인 가마 할아범은 밥 먹을 때조차 쉬지 않고 6개의 팔을 움직여 열심히(잇쇼켄메이) 일만 한다.
치히로를 비롯한 온천여관 지구언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시고토의 무한한 의무를 강요받으면서 혹사(?)당한다. 하쿠는 치히로에게 “이 세계에선 일하지 않으면 유바바가 동물로 만들어버려” -라는 규율을 알려주면서 “가마 할아범한테 거기서 일하고 싶다고 부탁해. 거절한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돼” 라고 말한다. 그러자 치히로는 충고에 따라 가마 할아범에게 가서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일하게 해주세요!” 하고 애원한다.
주인공 치히로에게는 오직 시고토만이 살아남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그래서 치히로는 이름을 잃어버렸는데도 ‘잇쇼켄메이’ 시고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치히로가 보여준 ‘마코토’의 실상이다.
<센과 치히로는 성장 이야기일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핵심 서사는 무엇일까? 그것은 온천 여관으로 표상되는 실재계가 실은 상징계(인간계)의 이면일 뿐이고, 따라서 거기서도 소외되고 분열된 상태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주체의 ‘불가능한 성장’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온천여관에 오기 전의 치히로는 겁쟁이에 무기력한 아이였다. 그러나 온갖 시련을 다 겪은 후 돼지가 된 부모를 인간으로 되돌아오게 한 치히로가 터널을 지나 본래의 세계로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겁쟁이에 무기력한 치히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전형적인 성장 이야기로 알려진 이 작품은 사실은 성장 이야기가 아닐지도??
그래서 하쿠와 치히로는 만나게 되었을까? - 의 문제는 영화가 나온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어쩌면 풀고싶지 않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팬들의 2차 창작물을 보며 위안을 삼거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모티프로 한 스핀오프를 기대해보는수밖에.
[참고 - 일본정신분석: 라캉과 함께 문화코드로 읽는 이미지의 제국, 박규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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