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해석 제 1,2탄
<오물신과 가오나시>
앞에서 온천여관에 내포된 재생의 모티브를 언급했는데, 미야자키는 특히 오물신과 가오나시라는 요괴를 통해 일본의 재생을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어쩌면 신의 살해 이야기를 통해 일본의 재생을 꿈꾸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좀 더 큰 테마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재생이라 말할 수 있다.
온천여관을 찾는 손님은 인간이 아니라 신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들도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 신들도 더럽혀질 수 있다는 것, 즉 신은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고 여기는 일본적 신 관념을 엿볼 수 있다. 오물신은 이런 신 관념을 극적인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다. 미야자키는 이 오물신과 관련하여 “일본의 강의 신들은 저 오물신처럼 슬프고 애절하게 살아간다. 이 일본이라는 섬나라에서 고통받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오물신 이야기가 단순히 판타지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일본인의 이야기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오물신은 일본의 위기를 암시하는 캐릭터인 것이다.
치히로가 더러움 그 자체인 오물신을 씻기고 그 몸에 박힌 큰 가시를 빼내자 거기서 미끄럼틀, 폐자전거, 매트리스, 스프링 등 근대 문명의 폐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자 오물신은 고명하고 아름다운 강의 신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가오나시>
가오나시는 일본어로 ‘얼굴없음’ 을 뜻하는 이름이다. 영화에서 이 캐릭터는 가면 같은 하얀 얼굴에 검은 신체를 하고 있다. 갈수록 흉폭해지는 이 신은 “외로워, 외로워. 갖고 싶다, 먹고 싶어”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블랙홀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가오나시는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만 그 생명체의 목소리를 빌려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가오나시의 몸은 갈수록 거대하게 팽창한다.
이런 그로테스크한 신체성은 과하게 묘사되는데, 어쩌면 제국주의적 근대 일본의 팽창주의를 상징하고 있는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묘사된 일본은 1930-1940년대의 일본, 즉 패전 전의 제국주의 일본이다. 가오나시의 신체성은 자본주의적 근대 일본의 과잉 소비문화, 감정과 이성의 과잉, 기계적 신체의 과잉을 표상한다. 그러한 과잉은 가오나시의 음식 섭취만이 아니라 정반대의 행위인 구토와 배설로도 표현된다. 가오나시는 오물신이 수많은 쓰레기를 토해내듯, 종업원들과 음식물을 토해낸 뒤 원래 크기로 돌아온다.
과잉을 뒤집어보면 텅 빈 결핍과 부재의 얼굴 없는 기표들이 가득하다. 텅 빈 기표로서의 가오나시. 그것은 일본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역설적인 캐릭터다.
<가오나시는 센에게 왜 집착했을까?>
여기서 가오나시와 치히로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자. 가오나시는 사금으로 치히로에게 호의를 표명하는데, 치히로가 이를 거부하자 그녀를 먹음으로써 소유하고 싶어 하는 공격성을 표출한다. 그럼에도 치히로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가오나시는 치히로를 따라다니면서 구토하고 똥을 싼다.. 이와 같은 가오나시의 편집증적 증상은 구순기의 아이 혹은 구순기 단계에서 성장이 멈추어버린 어른을 표상하기도 한다고…(말도 안돼!!) 치히로가 준 경단을 먹은 후 모든 것을 토해내고 얌전해진 가오나시가 치히로와 함께 제니바에게 갔다가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는 설정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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