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살펴본 줄거리와 무스비가 <너의 이름은>의 전개를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였다면, 이번 글에서 살펴볼 '구치가미사케'(미쓰하가 마쓰리 때 쌀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뱉은 걸 발효시켜 만든 술) 는 다키와 미쓰하의 재회를 가능케 만든 아주 중요한 요소다.
<구치가미사케>
미야미즈신사에서는 제사 때 실매듭 끈과 신악무 외에도 예로부터 신에게 ‘구치가미사케’라는 독특한 신주를 바쳐왔다. 미쓰하는 매년 열리는 미야미즈신사 마쓰리에서 무녀 차림으로 신에게 바치는 신악무를 춘 다음 구치가미사케를 만든다. 그것은 무녀가 쌀을 입에 넣고 씹어 뱉어 발효시켜 만드는 술을 가리킨다. (실제로 에도시대의 ‘진대塵袋’라는 책에 그 명칭과 제조 방법이 기술되어 나온다고 함) 하지만 감수성 옘니한 사춘기의 소녀 미쓰하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구치가미사케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싫었다. 그녀는 내심 자신이 살아온 시골 마을도 싫었고 언젠가는 그곳을 떠나 대도시로 가고싶어했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구치가미사케는 미쓰하의 절반 으로 묘사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공간을 넘어 미쓰하와 다키를 연결시켜주는 것이 바로 구치가미사케이기 때문. 미쓰하가 만든 구치가미사케를 마신 다키는 출생 때부터 현재까지 미쓰하가 살아온 모든 기억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다키는 이토모리 호숫가 산 정상에 올라가 미쓰하를 찾지만, 같은 장소에 있어도 현실 속에서는 3년이라는 시차로 인해 목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이윽고 황혼이 물들자 둘은 서로의 모습을 보게 된다. 황혼, 즉 ‘저녁. 낮도 밤도 아닌 시간. 사람의 윤곽이 흐려져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시간’인 ‘다소가레도키黄昏時’ 의 신비를 불러내는 구치가미사케의 힘을 보는 순간이다.
그때 다키는 팔목에 걸었던 실매듭 끈을 풀어 미쓰하에게 돌려준다. 이 실매듭 끈은, 이토모리 마을에 혜성의 운석이 떨어지기 전날, 도쿄에 갔다가 전철 안에서 만난 중학생 다키에게 미쓰하가 준 것. 그러나 당시 다키에게 미쓰하는 3년 후에나 만나는 미래의 사람이었으므로 당연히 누군지 알 수 없었고 미쓰하에게 “너의 이름은?” 이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야속한 타이밍이여..)
이에 미쓰하는 뒷머리에 묶었던 실매듭 끈을 풀어 다키에게 건네주면서 이름을 말한다. 잠에서 깨어나도 서로를 잊지 않도록 둘은 서로의 오른손에 글씨를 남긴다. 그 순간 어둠이 깔리면서 다키는 3년 후의 몸으로 되돌아간다. 그 직전에 다키는 “네가 세상 어디에 있든 내가 꼭 다시 만나러 갈거야”라고 미쓰하에게 약속한다. 하지만 손에 쓴 글씨는 곧바로 지워져버린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너의 이름은>에서 '이름'이 차지하는 위상은 어떤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한 전문가는 “언어가 아닌 몸과 감각으로 기억하는 내재적인 커뮤니케이션” 이라 했다. 그것은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이름을 끝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몸이 바뀌면서 기억한 몸적(?) 타자성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소통의 기억임을 상키시켜준다. 몸이 바뀐다는 것은 곧 이름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름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라는 미쓰하의 모노노아와레적 체념이나 “눈을 떠도 잊지 않도록 이름을 적어두자”는 다키의 공허한 절망은 ‘망각의 존재이지만 잊지 않기 위해 저항하는 인간’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감독 자신의 알기 쉬운 진술을 넘어서서, 실은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르면서 난 무언가를 계쏙 바라고 있다. 아주 조금만 더, 정말 조금만 더”, 곧 ‘무언가 더’(something more) 로서의 타자적 주이상스를 향하는 텅 빈 주체의 감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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